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思索(사색)

思索(사색) - 2

나는 학창 시절 1등을 해본 적이 없다. 학업 우수상을 받아 본 적이 없고, 그림을 잘 그려 사생 대회에 나가 상장을 받은 적도 없다. 피리와 같은 악기를 잘 다뤄 음악 경연대회에 나가 상장을 받은 적도 없다. 초, 중, 고 통틀어 받은 상장이라고는 개근상장 3개가 전부다.

 

그런 내가 검찰청이라는 조직에 들어와서 1등을 제법 여러 번 했다. 도망 다니는 사람을 귀신같이 찾아내어 교도소 보내는 것으로 꽤 많은 상장을 받았다. 또, 대기업 회장이 숨겨놓은 수백억 원의 비자금을 찾아내어 국고로 환수한 공을 인정받아 상장을 받았다. 1등을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 1등을 놓쳐본 적이 없는 사람들 틈에 끼어 지금까지 제법 잘해왔다.

 

국민교육 헌장에 나와있는 저마다 타고난 소질이 있으니 계발하라는 말이 맞는 것 같다. 비록 1등을 했지만 그리 달가운 1등이 아닌 것도 있다. 그것은  "검찰청 최초의 남자 육아 휴직자"라는 타이틀이다. 2000년 초반에는 남자 수사관이 육아휴직을 내는 경우는 없었다. 남자도 육야휴직을 낼 수 있다는 규정만 있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이는 없었다. 그런 까닭에 육아휴직을 신청한 나 때문에 인사 담당자는 관련규정을 찾아서 상부에 보고하느라 곤욕을 치렀다. 나는 나대로 상부에 불려 가 "무슨 남자가 육아휴직을 내느냐"는 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육아휴직 기간 아내와 돌이 갓 지난 딸아이를 차에 태우고 전국을 돌아다녔다. 그렇게 6개월을 보내고 나서 복직을 하려고 복직희망원을 제출하였을 때, 어느 부서에서도 "검찰청 최초의 남자 육아 휴직자"를 받아준다는 말이 없었다. 결국, 이리저리 돌던 내 복직희망원은 새롭게 신설되는 "범죄피해자 지원팀"으로 배정이 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어느 조직이나, 새롭게 신설되는 부서에는 지원자가 없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다양한 이유가 섞여 검찰청 최초의 남자 육아 휴직자는 피해자지원팀에 배속이 되었다. 당시에는 오로지 피고인(처벌을 받는 사람)의 인권만을 이야기했다. 피해자의 인권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출근길에 우연히 만난 동기들은 "피해자를 지원한다고?" "그게 뭐 하는 부서지?"라고 물었다. 육아휴직 기간 동안 무엇을 했는지 묻는 사람은 없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그리 관심이 많지 않다는 것을 그제야 알게 되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 남들에게 자신의 힘듦을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90%는 관심이 없다. 나머지 10%는 좋아한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고 나서 우리나라 최초로 서울중앙지검에 '범죄피해자지원과'가 생겼다.  

 

범죄피해자를 지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든 국민에게 알려야 하는 것이 우리 팀의 존재이유가 되었다. 곧이어 범죄피해자를 지원하고, 범죄피해자지원과가 생겼다는 것을 홍보하라는 상부의 오더가 내려왔다. 연쇄살인마 유영철에게 피해를 당한 유족을 돕자는 계획을 세웠다. 나아가 범죄피해자 지원과가 신설된 사실을 알리는 계획을 세웠다.

 

우리 팀은 전국최대의 산악자전거 동호회인 '와일드바이크'에 기부형태를 갖춘 사랑 나눔 장터를 만들었다. 장터에서 생긴 수익금으로 유영철에게 피해를 당한 사람들의 자녀들을 도왔다. 또, 당시 인터넷 포털로 유명했던 '드림위즈'에 '범죄피해자 지원과 신설'이라는 팝업창을 만들어 홍보를 했다. 요즘으로 말하면 네이버로 들어갔을 때 '서울중앙지검 범죄피해자 지원과 신설'이라는 거대한 팝업창이 뜨는 것이었다. 우리는 누구도 생각해 내지 못한 방법으로 피해자지원 업무를 홍보하였다.

 

상부에서는 이런 홍보 방법에 많이 놀랐다. 당시 법무부장관은 홍보업무를 성공적으로 해낸 우리 팀에게 직접 격려전화를 했다. 그 결과로 나는 서기보(9급)로는 최초로 검찰총장 모범직원 상장을 받았다.  '모범직원'이라는 명칭을 보아도 아랫사람들 혹은 동료들에게 모범이 되어야 한다. 직장생활 시작한 지 몇 해 되지 않는 서기보가 모범을 보일 일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범직원 표창을 전수했다.

 

이렇게 시작된 범죄피해자 지원시스템이 현재까지 발전을 하게 되었다. 현재, 살인 피해를 당한 유족이라면 국가로부터 수천만 원의 피해지원금을 받을 수 있다. 현재 담당업무가 아니라서 정확한 액수는 모르겠다. 다양한 방법으로 지원을 하고 있으니 혹시라도 강력범죄(살인, 강도 등)의 피해를 입었다면 가까운 검찰청에 방문해 상담해 보길 권한다.

 

살아보니 우리의 삶에 있어서 1등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닌 것 같다. 마찬가지로 자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해서 좌절을 할 필요도 없는 것 같다. 내가 만약 피해자지원팀에 가지 않았다면 서기보 최초로 모범직원이라는 상장을 받을 가능성은 없다.  세상에 나쁜 일은 없다. 우리는 누군가의 안배로 나에게 가장 잘 좋은 곳으로 안내되고 있음을 기억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