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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I REVIEW

Fischer The Curv 164 (25-26) - 10년의 기다림, 그리고 설원 위에서의 완벽한 해후


 

1. 기억 속에 각인된 10년 전의 전율

제가 '피셔 더 커브(The Curv)'라는 이름을 가슴 한편에 깊이 새기게 된 것은, 벌써 10여 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과거의 일입니다. 당시 우연한 기회에 지인의 스키를 빌려 신게 되었는데, 그 스키와 함께 용평리조트의 골드 메인 슬로프 앞에 섰던 순간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광활하게 펼쳐진 골드 슬로프의 상단에서 하단까지, 쉬지 않고 카빙 턴으로 설면을 가르며 내려왔을 때의 그 느낌은 단순한 '장비 체험'이 아니었습니다. 발끝에서 시작되어 온몸을 관통하는 짜릿한 전율, 그리고 묵직하게 설면을 파고드는 압도적인 안정감. 그것은 저에게 스키라는 스포츠가 줄 수 있는 가장 강렬한 '인상'으로 남았습니다.

 

2. 실망과 기다림의 시간

 

그 찰나의 감동은 슬로프를 떠난 뒤에도 쉬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 '손맛'을 다시 소유하기 위해 중고 장터를 하이에나처럼 뒤졌습니다. 부지런히 검색어를 입력하고 게시판을 새로고침 했지만, 제 마음을 뺏어간 그 물건은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속초에 계신 분이 스키를 매물로 내놓았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한달음에 달려가 물건을 확인하고 구입했습니다. 한데, 결과는 조금 실망스러웠습니다. 연식의 차이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티타늄 판이 얇아진 탓이었을까요? 골드 슬로프에서 느꼈던 그 묵직하고 날카로운 맛은 온데간데없었고, 스키는 제 기대보다 가볍게 날리는 느낌이었습니다. 씁쓸한 입맛을 다시며, 그렇게 10년이라는 시간이 유수와 같이 흘러갔습니다.

 

3. 다시 손에 쥔 '더 커브', 그리고 비발디의 설원

 

그리고 이번 시즌, 마치 운명처럼 피셔의 최신작 '더 커브'를 제 손에 쥐게 되었습니다. 과연 10년 전 첫사랑 같던 그 감각이 여전할지, 혹은 세월 속에 퇴색되었을지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비발디파크로 향했습니다.

 

테스트 환경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테크노, 힙합, 펑키 슬로프를 오가며 빙판이 곳곳에 도사리는 거친 강설 위를 초 10시간 동안 달렸습니다. 가혹한 조건은 오히려 이 스키의 진가를 확인하는 무대가 되었습니다.

 


 

4. 감각을 증명하는 기술의 미학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이 스키는 제가 경험한 스키 중 가장 우아하고, 가장 힘들이지 않으며, 가장 완벽하게 설면을 달리는 명기였습니다. 뵐클이나 아토믹이 야생마 같은 파워를 가진 스키였다면, 피셔 더 커브는 기수의 호흡을 읽어내는 명마와도 같았습니다. 이 놀라운 주행감의 배후에는 치밀하게 계산된 공학적 기술들이 숨어 있었습니다.

 

 

① 스키딩 숏턴의 절정: 탑(Tip)부터 파고드는 '라디컬 트리플 라디우스'

 

 

이번 시승의 백미는 폭을 넓게 가져가며 낙차를 크게 만드는 스키딩 숏턴 구간이었습니다. 보통 낙차가 큰 턴에서는 스키의 조작이 버거울 수 있으나, 이 녀석은 턴의 도입부에서 탑(Tip)이 마치 먹이를 낚아채듯 설면을 즉각적으로 물고 들어갑니다. 머뭇거림 없이 탑부터 감겨 들어가는 그 쫀득한 '턴의 맛'은 스키어로서 느낄 수 있는 최상의 희열이었습니다.

 

이 기민한 반응의 비밀은 바로 '라디컬 트리플 라디우스(Radical Triple Radius)' 기술에 있었습니다. 스키의 앞(Tip)과 뒤(Tail)에는 짧은 회전 반경(Short Radius)을 적용해 턴의 진입과 탈출을 날카롭게 하고, 발 밑(Center)에는 긴 회전 반경(Long Radius)을 적용해 안정성을 극대화한 이 설계 덕분에, 제가 의도하는 찰나의 순간에 스키는 이미 턴을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② 일정한 깊이의 미학: 빙판을 정교하게 가르는 '카본 브릿지'

 

 

테크노 슬로프 상단의 급경사, 그곳에 도사린 빙판 위에서 저는 이 스키의 진정한 가치를 확인했습니다. 무엇보다 놀라웠던 것은 '일정한 깊이로 박히는 에지의 감각'이었습니다.

 

빙판을 만나면 본능적으로 스키를 강하게 밟아 박아 넣으려 애쓰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이 스키는 굳이 무리한 하중을 싣거나 악을 쓰며 누르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저 가볍게 밟아주는 것만으로도, 스키의 날(Edge)은 마치 자를 대고 그은 듯 일정한 깊이로 설면을 파고들며 묵직하게 고정되었습니다.

 

이는 스키 내부에 삽입된 '카본 브릿지(Carbon Bridge)'가 주는 비틀림 없는 강성, 그리고 사이드 3도 / 베이스 0.8도라는 정교한 팩토리 튜닝이 만들어낸 합작품이었습니다. 속도가 빨라질수록 불안함은 사라지고, "더 밟아도 된다"는 확신만이 남았습니다.

 

③ 스키와 내가 하나 되는 경지

 

 

14.5m의 회전 반경과 개당 2,250g의 적당한 무게감은 스키어와 장비 사이의 이질감을 완전히 지워버렸습니다. 내가 스키를 이기려 애쓰지 않아도, 스키는 내 신체의 일부처럼 반응했습니다.

 

우리가 흔히 명차를 논할 때 "잘 달리는 것만큼 잘 서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이 스키가 딱 그러했습니다. 질주 본능을 깨우며 달리다가도, 서고 싶을 때 정확히 멈춰 서는 제동력은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녀석을 제어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5. 에필로그: 멈추고 싶지 않은 질주 본능

 

보통 거친 슬로프에서 월드컵을 신고 두시간 이상을 달리면 체력은 방전되고 다리는 후들거리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리프트를 타고 오르는 내내 제 머릿속은 '빨리 다시 내려가고 싶다'는 열망으로 가득 찼습니다.

 

피로보다 즐거움이 앞서는 경험, 계속해서 타고 싶게 만드는 묘한 마력. 이것이야말로 좋은 장비가 주는 최고의 선물이 아닐까 합니다. 10년 전, 어설픈 짝사랑으로 끝났던 그 스키는 이제 최첨단 기술이라는 갑옷을 입고 훨씬 더 성숙하고 믿음직스러운 파트너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설원 위에서 진정한 자유와 일체감을 맛보고 싶은 분들께, 이 아름다운 녀석과의 동행을 주저 없이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