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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민원실(밀리의 서재 당선작)

1. 호국원에 갈 수 없는 6.25 참전 용사

 

아버지는 6.25 참전용사였다.

어린 시절, 이불 속에서 듣던 아버지의 전쟁 이야기는 놀라움 그 자체였다.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산비탈 아래에서 올라오는 인민군을 향해 M1 소총을 쏘면, 탄환을 맞은 적병이 4-5 미터 뒤로 날아간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무서워 이불을 뒤집어썼다. 안방 다락에는 아버지가 받은 훈장 여러 개가 먼지를 뒤집어쓴 채 놓여 있었다.

하지만 참전용사라는 이름이 아버지께 돌아온 것은 훈장뿐이었다. 보훈대상자로 지정되지 않았고, 그 탓에 나는 수사관 시험에서 가산점 하나 받지 못했다. 아버지에게 국가가 준 것은 기억뿐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아버지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혹은 밥벌이를 위해 강원도 두메산골에서 진료를 하셨다. 정식으로 의사가 되신 것은 아니었다. 전쟁 중 스스로 살기 위해, 동료들을 지키기 위해 배웠던 의술로, 전쟁이 끝난 후에도 많은 사람을 치료하신 것이다.

그러나 그 진료 행위는 법적으로 무면허 의료업이었다. 전문용어로는 '보건범죄에 관한 특별조치법 위반'이었다. 수사관인 내가 아버지의 행위를 정당화하려는 것은 절대 아니다. 다만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그 기억을 붙들어두고 싶을 뿐이다.

내가 검찰수사관이 되기 육 개월 전,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어린 시절 뛰놀던 동네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때 나는 아버지가 처벌받은 사실을 알지 못했다.

어린 시절, 나는 방학이 될 때마다 아버지가 계신 강원도 산골 마을로 갔다. 여름에는 하루 종일 산과 들을 돌아다니며 싱싱한 열매와 더덕을 캐 먹었고, 겨울에는 얼어붙은 논바닥에서 썰매를 탔다. 밤이면 화로에 고구마와 감자를 구워 먹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 마을에서 마주치는 어른들은 모두 나를 '최 의사 아들'로 불렀다. '최 의사'는 마을 사람들이 아버지를 부르던 호칭이었다.

"최 의사님 계세요?"

늦은 밤이면 몸이 아픈 마을 사람들이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아버지를 찾았다. 때로는 가족이 위독하다며 급하게 뛰어오는 사람도 있었다. 아버지는 잠자리에서 일어나 주사기와 수술 도구를 챙겼다. 전쟁에서 수류탄을 맞아 절뚝이게 된 다리를 이끌고 방을 나섰다.

처음에는 낯설었던 풍경이 점점 익숙해졌다.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 시절, 아버지의 밤마실 정도로 여겼던 그 광경은, 세월이 흘러 다시 돌이키니 참으로 숭고한 장면이었다. 전쟁의 상처를 끌어안은 채 다른 이를 돕기 위해 어둠 속을 절뚝이며 걸어가던 아버지의 뒷모습.

그 숭고함은 아버지가 떠난 후 몇십 년이 지난 뒤에도 계속 내 주변에 존재했다.

아버지가 하숙하던 집의 집주인이자 어린 내게 밥을 해주고 씻겨주던 아주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을 찾은 날이었다. 빈소를 지키던 사람 중 한 명이 나를 보고 '최 의사 아들'이냐고 물었다. 그는 아버지 덕분에 지금까지 살 수 있었다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최 의사가 살아서 들어오는 줄 알았다."

그는 내가 아버지를 꼭 닮았다고 했다.


사실 아버지가 시골 마을에서 의료 행위를 하시던 1980년대 초반, 병원에 갈 수 있는 사람보다 그럴 수 없는 사람이 훨씬 많았다. 돈도 돈이었지만, 병원 자체가 적었다. 하루에 버스가 한두 대 정도 드나드는 시골에서는 병원에 갈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 탓에 사소한 질병도 치료 시기를 놓쳐 심각한 병이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 아버지는 곪아 터진 다리를 잘라 고름을 빼고, 항생제를 놓고, 다리를 꿰매며 그들의 생명을 구했다.

큰 병에 걸린 사람들은 공무원 의료보험증을 빌려 병원에 갔다. 간호사의 확인을 우려해 보험증에 적힌 주민번호를 외워 자신이 의료보험증의 주인임을 증명하려 했다. 어두운 시대, 대한민국의 현실이었다.


아주머니의 장례식장에 다녀온 뒤, 검찰청 민원실에서 근무하던 어느 날이었다. 민원인 한 명이 자기 아버지를 호국원에 안장하기 위해 판결문을 발급받으러 왔다. 그에게 오래된 판결문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설명하고 나서, 문득 나도 아버지를 호국원에 이장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호국원에서 요청하는 모든 절차를 이행하고 답을 기다렸다. 그런데 돌아온 답은 전혀 예상 밖이었다.

아버지에게 범죄 이력이 있어 호국원 이장이 불가하다는 것. 게다가 그 범죄 행위가 무면허 의료행위라는 답변이었다. 가벼운 범죄라면 가능하겠지만 힘들다는 말이었다.

더 자세한 설명을 요구한 나는 상상도 못 한 답변을 듣게 되었다.

아버지가 불법 의료 행위로 치료한 인원이 사만 명에 달한다는 것. 그리고 범죄 수익은 일억에 가깝다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머물던 시골 군의 인구는 사만 명이 채 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산골 구석구석에서 병원 치료를 받지 못하던 사람들 대부분이 아버지에게 진료를 받았다는 뜻이었다.

전화로 소식을 전해준 담당자는 내 난처함을 눈치챘는지 한 가지 방향을 제안했다. 행정소송을 제기하면 호국원 이장이 가능할 수도 있다고.

그러나 나는 행정소송을 제기할 마음이 없었다. 그 절차를 위해 얼마나 많은 공무원이 번거로울 것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나는 아버지가 사만 명 넘는 사람을 진료했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지 않았다. 설령 그것이 불법적인 의료 행위라 할지라도. 그때 아버지에게는 그것이 최선이었을 것이다.

생각을 마친 나는 한마디를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우와, 우리 아버지 정말 명의셨네요. 의료사고를 내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법은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공정을 기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때로는 인간의 본능적인 선행을 외면할 때도 있다.

아버지의 무면허 의료업은 법적으로는 범죄였다. 하지만 실제로 그 의료 행위가 낳은 결과는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었다. 죄와 선행 사이, 그 모호한 경계 어딘가에 아버지가 서 계셨다.

나는 검찰수사관으로서 법을 집행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그런 내이기에, 아버지를 호국원에 이장하려다 겪은 일련의 경험은 법의 한계와 인간성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반드시 지켜야 하는 법이라는 규범 이면에는 언제나 숨은 선의가 존재한다. 법을 집행하는 과정에서도 그 인간적인 면모를 잃지 않도록 노력하고 싶다.

이 모든 것이 아버지에게 배운 것이다. 돌아가신 후에도 내게 삶의 소중한 교훈을 주시는 고마운 분이다.

예전에는 아버지를 닮았다는 이야기가 별로 기분 좋지 않았다. 이제는 그 말이 나쁘지 않게 들린다. 아니, 자랑스럽다.

절뚝이는 다리로 어둠 속을 걸어가던 아버지의 뒷모습이, 이제야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한다. 법과 인간성 사이 어딘가에서, 나도 아버지처럼 걷고 있는지 모른다.

'최 의사'라는 이름으로 기억되는 아버지. 호국원의 묘비에는 새겨지지 못했지만, 사만 명의 가슴속에 새겨진 그 이름이 더 빛나는 것 같다.